정들었던 모임에서 또 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모임이 증발해 버렸다. 정말 공을 많이 들였던 철산 모임이었다.

철산동은 개인적으로 추억이 많았던 장소이다. 초등학생 시절 철산동에서 살았었고, 세월이 지나 대학생 때 하루 종일 오락실에서 리듬 게임을 하고 고추장 불고기 맛집을 자주 갔던 기억이 있다. (우린 그걸 ‘장껑지’ 라고 부르곤 했다. 솥뚜껑 삽겹살, 돼지 갈비 ㅎㅎㅎ)

바로 그 골목에서 1년 전 보드게임 모임이 있었다. 인원은 아직 많지 않은 신생 모임이었다. 전에 있던 모임은 이런저런 이유로 탈퇴했고 새로운 모임을 찾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보드게임을 살 때 어느 정도 라인업을 생각하며 구매하는 편이다. 초보자용 게임 라인업 / 입문 전략용 라인업 등등 이런 식인데 다들 경험 많지 않은 초심자라서 몇 개 게임을 챙겨서 첫 모임에 참석했다.

나 포함 4명이 모였는데 보드게임 유전자(?)는 많지 않은, 그냥 보드게임 카페 일반 손님 생각하면 될 거 같다. 그래도 재미있었는지 다들 보드게임을 너무 재미있게 즐기고 3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저녁도 같이 치킨 먹으러 갔는데 이런저런 이야기 많이 하고 칭찬도 받아 좋았다. 옛날 추억이 있던 장소라서 이곳이 정겹다고 할까나? 여하튼 이 모임을 꾸준히 키워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보드게임 페스타도 같이 다니면서 거의 도슨트 역할도 해줬다. 게임 소개를 목이 쉴 정도로 해줬고 나도 모임원들이 좋아할 만한 간단한 보드게임도 더 구매하게 되었다.

그렇게 좋은 추억을 쌓아가던 모임이 약간씩 삐그덕거리기 시작한 건 6개월쯤 지나고 부터였다. 나는 긱 웨이트 기준 2.0 미만의 게임만 주구장창 돌렸다. 이유는 카르카손 정도의 난이도임에도 잘 따라오지 못해 트러블이 생겨 탈퇴자가 생겼을 정도로 웨이트 있는 게임은 전반적으로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약간 웨이트가 있는 새로운 게임을 소개하던 분이 있었는데 다들 같이 게임하길 부담스러워해서 결국 모임장의 권유로 소중한 룰마도 탈퇴하는 일이 있었다. 모임은 점점 자연스레 룰마인 나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나는 낮은 웨이트 게임을 해도 관계는 없지만 나도 모든 게임을 다 알 수는 없고 무엇보다 게임을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지 않아서 하던 게임을 반복하는 일이 많아졌다. 일반 프렌차이즈 보드카페는 생각보다 게임이 다양하지 않았다.

가끔 전략 게임을 돌리기도 했는데 참여율은 저조하고 장시간 게임하는 걸 대부분 부담스러워했다. 뭔가 예전만큼 재미있어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신규 유입 인원은 없었고 모임이 정체되는 분위기였다.

그러한 걱정을 뒤로하고 송년회도 하고 모임에 대한 의견도 내고 모임 이름도 바꾸고… 모임이 다시 부흥하길 기대했다. 그러나 송년회 이후 3개월 뒤 모임장이 모임 폐쇄 공지를 띄우고 다음 날 모임은 삭제되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모임장이 사람들에 쌓인 스트레스와 보드게임이 더 이상 즐겁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던 거 같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모임 삭제 이후 드는 생각이 첫째는 내 기준에서는 오랜 시간 정착할 생각으로 공을 많이 들였는데 모임이 날아가는 건 한순간이라 좀 허무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시간을 보낸 걸까? 비유하자면 할리갈리, 젠가 수준의 게임만 거의 1년 가까이 돌린 셈이다. 물론 그럼에도 즐거웠던 순간은 있었다.

둘째는 흔히 말하는 보드게임 유전자가 없는 일반인을 굳이 억지로 끌고 갈 필요는 없단 생각이 많이 들었다. 처음에는 규칙을 이해 못 하는 사람이 있어도 끌고 가보려고 했는데 그냥 좀 더 어려운 게임 소개하고 스스로 나랑 안 맞는 취미인 걸 느끼게 해주는 것도 방법일 거 같다. 계속 모임에 놔두면 괜히 분위기만 흐려지고 트러블 생긴다. 모임을 위해 서로서로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철산 모임은 사라졌으니 나도 이제 즐겨보자.

모임은 증발했지만 실은 더 많은 게임을 공부하고 즐겼다. 그간 못 돌렸던 세티를 재미있게 했고, 최근엔 비탈 신작 스피크이지로 플레이했다. 스피크이지는 나름 열심히 룰을 숙지하고 룰마도 한 번 해봐서 수월한 진행 가능하다. 맨날 쉬운 게임만 돌렸지만 그냥 내 개인 보드게임 목표는 규칙 내용이 많고 다들 어려워하는 게임을 매끄럽게 진행하는 것이다. 딱히 이유는 없다. 자기만족인 셈이랄까? 어려운 게임을 함께 즐기는 시간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오랫동안 기억되고 싶다.

초심을 잃지말고 룰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